몬테레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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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몬테레이 전투는 1846년 9월 19일부터 24일까지 멕시코-미국 전쟁 중 벌어진 전투로, 멕시코군은 몬테레이를 방어하려 했고, 미군은 도시를 점령하려 했다. 멕시코군은 7,303명의 병력으로 도시를 방어했고, 미군은 6,640명의 병력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미군은 3일간의 시가전 끝에 도시를 점령했지만, 멕시코군의 거센 저항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다. 전투 후 테일러와 암푸디아는 휴전 협정을 맺었지만, 이로 인해 테일러는 비난을 받았고, 멕시코의 패배를 앞당겼다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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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레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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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미국-멕시코 전쟁 |
날짜 | 1846년 9월 21일 – 9월 24일 |
장소 | 누에보레온주 몬테레이 |
결과 | 미국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미국 |
교전국 2 | 멕시코 |
지휘관 및 지도자 | |
미국 | 자카리 테일러 |
멕시코 | 페드로 데 암푸디아 호세 가르시아-콘데 프란시스코 메히아 |
병력 규모 | |
미국 | 6,220명 |
멕시코 | 7,303명 |
사상자 및 피해 | |
미국 | 사망 120명 부상 368명 실종 43명 |
멕시코 | 367명 사상 |
시각 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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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 결과, 5월 18일 재커리 테일러 장군은 리오그란데 강을 건넜다.[1] 6월 초, 마리아노 아리스타 장군은 북부군 병력 약 2,638명의 지휘권을 프란시스코 메히아에게 넘겨주었고,[13] 메히아는 이들을 몬테레이로 배치시켜 미군에 맞서기 위한 재정비를 했다.
7월 초, 토마스 레케나 장군은 1,800명의 병력으로 몬테레이를 수비했고, 8월 말 아리스타 군대의 잔여 병력과 멕시코시티에서 온 추가 병력이 도착하여 멕시코군은 총 7,303명이 되었다.[1] 멕시코시티에서 온 증원군은 총 3,140명으로, 가르시아-콘데 여단(1,080명), 아스페이티아 여단(1,000명), 시메온 라미레스 여단(1,060명)과 대부분 아일랜드계 미국인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포병 부대인 성 패트릭 대대였다.[1]
페드로 데 암푸디아 장군은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로부터 살티요시로 더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테일러의 진격을 막을 수 있다면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1] 암푸디아의 병사들은 끊임없는 패퇴로 반란 직전이었고, 결국 몬테레이에서 교전을 선택했다.
2. 1. 미국의 팽창주의와 텍사스 합병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 결과, 재커리 테일러 장군은 5월 18일에 리오그란데강을 건넜다.[1] 6월 초, 마리아노 아리스타 장군은 북부군 병력 약 2,638명의 지휘권을 프란시스코 메히아에게 넘겨주었다.[13] 메히아는 이들을 몬테레이로 배치시켜 미군을 다시 맞기 위해 재정비를 했다. 7월 초, 토마스 레케나 장군은 1,800명의 병력으로 몬테레이를 수비했고, 8월 말까지 멕시코시티에서 온 추가 병력이 도착하여 멕시코군은 총 7,303명이 되었다.[1]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는 페드로 데 암푸디아 장군에게 살티요시로 더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암푸디아는 테일러의 진격을 막을 수 있다면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1] 암푸디아의 병력에는 멕시코시티에서 온 총 3,140명의 증원군이 포함되었다. 여기에는 가르시아-콘데 여단 1,080명, 아스페이티아 여단 1,000명, 시메온 라미레스 여단 1,060명, 그리고 대부분 아일랜드계 미국인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포병 부대인 ''성 패트릭 대대''가 있었다.[1]
6월 8일, 미국 전쟁장관 윌리엄 L. 마시는 테일러에게 멕시코 북부 작전의 지휘를 계속하고, 몬테레이 점령을 제안하며, 그의 목표를 "적이 전쟁 종식을 원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정의했다.[1] 8월 8일, 테일러는 카마르고에 6,640명의 병력으로 점령군 사령부를 설치한 후, 9월 9일에는 세랄보로 옮겼다.[1] 테일러는 9월 11일 몬테레이로 진군을 재개하여 9월 15일 마린에 도착했고, 9월 18일에 출발했다.[1]
2. 2. 국경 분쟁과 군사적 충돌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 결과, 5월 18일 재커리 테일러 장군은 리오그란데강을 건넜다. 6월 초 마리아노 아리스타 장군은 북부군 병력 약 2,638명의 지휘권을 프란시스코 메히아에게 넘겨주었다.[13] 메히아는 이들을 이끌고 몬테레이로 이동하여 미군과 맞서기 위해 재정비를 하였다. 한편, 페드로 데 암푸디아 장군은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로부터 살티요 시까지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계속된 패퇴로 인한 병사들의 반란을 우려하여 명령을 거부하고 몬테레이에서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1]멕시코시티에서는 몬테레이 전투를 위해 원군이 파병되었다. 원군은 1,000명의 아즈페이티아 대대, 1,060명의 시므온 라미레즈 대대와 포병대 한 부대, 그리고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주축인 성 패트릭 대대(산 파트리시오스)로 구성되어, 미군과의 첫 대규모 전투를 앞두고 있었다.[1] 7월 초, 토마스 레케나 장군은 1,800명의 병력으로 몬테레이를 수비하고 있었고, 8월 말까지 아리스타 군대의 잔여 병력과 멕시코시티에서 온 추가 병력이 도착하여 멕시코군은 총 7,303명이 되었다.[1] 이 증원군에는 가르시아-콘데 여단(1,080명), 아스페이티아 여단(1,000명), 시메온 라미레스 여단(1,060명) 등이 포함되었다.
2. 3. 멕시코의 정치적 상황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 결과, 5월 18일 재커리 테일러 장군은 리오그란데 강을 건넜다.[1] 6월 초, 마리아노 아리스타 장군은 북부군 병력 약 2,638명의 지휘권을 프란시스코 메히아에게 넘겨주었고,[13] 메히아는 이들을 몬테레이로 배치시켜 미군에 맞서기 위한 재정비를 했다.7월 초, 토마스 레케나 장군은 1,800명의 병력으로 몬테레이를 수비했고, 8월 말 아리스타 군대의 잔여 병력과 멕시코시티에서 온 추가 병력이 도착하여 멕시코군은 총 7,303명이 되었다.[1] 멕시코시티에서 온 증원군은 총 3,140명으로, 가르시아-콘데 여단(1,080명), 아스페이티아 여단(1,000명), 시메온 라미레스 여단(1,060명)과 대부분 아일랜드계 미국인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포병 부대인 성 패트릭 대대였다.[1]
페드로 데 암푸디아 장군은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로부터 살티요시로 더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테일러의 진격을 막을 수 있다면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1] 암푸디아의 병사들은 끊임없는 패퇴로 반란 직전이었고, 결국 몬테레이에서 교전을 선택했다.
3. 전투
3일 동안 미군은 도시 점령에 실패했다. 끈질긴 멕시코군의 저항으로 미군 장교들이 상당한 손실을 입었고, 미국군 보병들은 몬테레이 시내의 많은 요새 벽을 돌파하지 못했다. 3일째, 텍사스 레인저스 부대와 윌리엄 J. 워스 장군이 지휘하는 보병 부대는 간신히 도시 서쪽의 네 개 언덕을 점령했다. 여기에 대포를 설치하여 언덕에서 도망치는 군대를 공격하는 데 사용했다. 미국군은 양동 작전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나뉘어 도시로 진입했다.
재커리 테일러 장군의 군대는 텍사스 사단(제임스 핀크니 헨더슨 소장 겸 텍사스 주지사 제임스 핀크니 헨더슨)이 선두에 선 채 9월 19일 오전 9시에 몬테레이 앞 평원에 도착했고, 성채 꼭대기에 위치한 산 파트리시오 포대에 있는 호세 로페스 우라가 대령의 제4보병대 포병의 사격을 받았다.[1] 테일러는 공병대(조셉 K. 맨스필드 소령)의 정찰을 위해 군대가 보스케 데 산 도밍고에 진을 치도록 명령했다.[1]
성채 외에도 도시 내 멕시코군의 주요 거점은 다음과 같았다.[1]
- "흑색 요새"(호세 로페스 우라가 대령, 제3·4선 및 9문의 대포 – "산 파트리시오" 포대 포함)
- "무두장"(라 테네리아)(호세 M. 카라스코 대령 지휘하의 제2경보병대와 케레타로 대대 일부, 2문의 대포 및 1문의 산악 포 – J. 에스페호 중위)
- 엘 포르틴 델 린콘 델 디아블로(칼리스토 브라보 중령과 3문의 대포 – 이그나시오 호아킨 델 아레날 대위)
- 라 푸리시마 다리와 테트드퐁(아과스칼리엔테스의 활동부대, 호세 페로 대령과 케레타로 지휘관 호세 마리아 에레라 지휘하, 3문의 대포 – P. 구티에레스 대위)
도시 서쪽 인데펜덴시아 꼭대기에는 리베르타드 요새(4문의 대포)와 오비스파도(주교 관저)가 있었고, 프란시스코 데 베라 중령이 이끄는 멕시코 활동 부대와 3문의 대포와 1문의 곡사포가 주둔했으며, 페데라시온 꼭대기에는 반월형 요새(2문의 대포)와 솔다도 요새가 있었다.[1] 라 플라자 예비대에는 후안 카스트로 중령 지휘하의 제3경보병대와 1문의 대포(아구스틴 에스피노사 중위)가 있었다.[1]
재커리 테일러 장군은 주력 부대를 동쪽에서 공격하는 동시에 윌리엄 J. 워스 사단을 이용하여 거대한 북서쪽 "갈고리" 기동으로 몬테레이 서쪽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1] 워스는 9월 20일 오후 2시에 존 커피 헤이스 대령의 텍사스 기병 소총병 연대가 선봉을 서서 출발했지만, 살티요 도로에서 3마일 떨어진 곳에서 야영했다.[1]
9월 21일 오전 6시, 워스는 전진을 계속하여 후안 나헤라 대령의 할리스코 기병대의 돌격을 격퇴하고, 나헤라 대령과 마누엘 로메로 장군 여단과 마리아노 모레트 중령의 과나후아토 연대 선봉대를 사살했다.[1] 오전 8시 15분, 워스는 살티요 도로를 몬테레이에서 차단하고, 찰스 F. 스미스 대위에게 보병 300명과 텍사스인, 딕슨 마일스 대위의 제7보병대 및 퍼시포어 스미스의 제2여단을 파견하여 페데라시온과 솔다도 요새를 점령하게 했는데, 그들은 이를 신속하게 점령했다.[1]
한편, 테일러는 존 갈랜드 대령의 제1·3보병대와 윌리엄 H. 왓슨 중령의 메릴랜드 및 컬럼비아 특별구 대대를 이용하여 몬테레이 동쪽에 대한 기만 공격을 시작했고, 이는 신속하게 공격으로 이어졌다.[1] 오전 8시, 일렉투스 배커스 대위의 제1보병대 중대가 무두장을 점령했고, 정오에는 윌리엄 B. 캠벨 대령의 제1테네시 및 미시시피 소총병대가 라 테네리아 요새를 점령했다.[1][2][3]
9월 22일에는 공격이나 돌격이 없었다.[1]
9월 23일 오전 3시, 워스는 텍사스 레인저와 제4·8보병대를 토마스 차일즈 중령 지휘하에 파견하여 인데펜덴시아의 리베르타드 요새를 점령하게 했고, 그들은 해 뜰 무렵에 이를 점령했다.[1] 제임스 던컨의 포병대의 도움으로 그들은 곧 오비스파도를 점령하고 몬테레이 서쪽을 장악했다.[1][2] 그때 쯤 멕시코군은 몬테레이 동쪽의 외곽 방어선을 버리고 플라자 마요르에 집결했고, 존 A. 퀴트먼 여단은 오전 11시까지 몬테레이 동쪽을 장악했다.[1]

9월 23일 오후 2시, 워스 장군은 서쪽에서 도시로 진격하여, 오후 늦게 플라자 데 라 카펠라에 설치된 박격포의 지원을 받아 집집마다 전투를 벌였고, 오후 11시까지 광장 서쪽 한 블록 내에 있었다.[1] 텍사스 자원병들은 미국 정규군에게 도시 전투의 새로운 기술을 가르쳤는데, 이 기술은 9월 21일에는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이 새로운 시가전 기술을 갖춘 미국군은 텍사스, 미시시피, 테네시 자원병과 함께 집집마다 이동하며 옥상과 멕시코 북부의 두꺼운 어도비 벽으로 된 집 안에 숨어 있는 멕시코군을 소탕했다.[4][5] 오후 2시, 테일러와 퀴트먼은 광장 동쪽 두 블록 이내에 있었는데, 테일러는 해가 지기 전에 철수를 명령했다.[1]
도시 벽 안에서의 백병전이 계속되었다. 텍사스 레인저들은 가옥 안으로 소형 포탄을 던져 경상을 입었지만, 멕시코군을 창밖으로 날려 버렸다. 멕시코군은 도시 광장에 집결했다. 광장에서 매복에 걸려 곡사포 사격을 받자, 암푸디아 장군은 협상을 결정했다. 적지에서 더 많은 병력과 싸웠야 했던 테일러는 도시 항복의 대가로 2개월 휴전 협정을 협상했다. 멕시코군은 9월 26일부터 28일까지 개인 무기와 6문의 대포로 구성된 야전 포병 1개 포대를 가지고 도시에서 행군할 수 있었다.[1]
3. 1. 멕시코군의 방어 준비
재커리 테일러 장군의 군대는 제임스 핀크니 헨더슨이 이끄는 텍사스 사단이 선두에 선 채 9월 19일 오전 9시에 몬테레이 앞 평원에 도착했고, 성채 꼭대기에 위치한 산 파트리시오 포대에 있는 호세 로페스 우라가 대령의 제4보병대 포병의 사격을 받았다.[1] 테일러는 공병대 (조셉 K. 맨스필드 소령)의 정찰을 위해 군대가 보스케 데 산 도밍고에 진을 치도록 명령했다.[1]성채 외에도 멕시코군의 주요 방어 거점은 다음과 같았다:[1]
- "흑색 요새" (호세 로페스 우라가 대령, 제3·4선 및 9문의 대포 – "산 파트리시오" 포대 포함)
- "무두장"(라 테네리아) (카라스코 대령(José M. Carrasco) 지휘하의 제2경보병대와 케레타로 대대 일부, 2문의 대포 및 1문의 산악 포)
- 엘 포르틴 델 린콘 델 디아블로 (칼리스토 브라보 중령과 3문의 대포)
- 라 푸리시마 다리와 테트드퐁 (아과스칼리엔테스의 활동부대, 호세 페로 대령과 케레타로 지휘관 호세 마리아 에레라 지휘하, 3문의 대포)
도시 서쪽 인데펜덴시아 꼭대기에는 리베르타드 요새(4문의 대포)와 오비스파도(주교 관저)가 있었고, 프란시스코 데 베라 중령이 이끄는 멕시코 활동 부대와 3문의 대포와 1문의 곡사포가 주둔했으며, 페데라시온 꼭대기에는 반월형 요새(2문의 대포)와 솔다도 요새가 있었다.[1] 라 플라자 예비대에는 후안 카스트로 중령 지휘하의 제3경보병대와 1문의 대포가 있었다.
테일러 장군은 주력 부대를 동쪽에서 공격하는 동시에 윌리엄 J. 워스 사단을 이용하여 몬테레이 서쪽을 공격하는 "갈고리" 기동을 하기로 결정했다.[1] 9월 21일, 워스는 할리스코 기병대의 돌격을 격퇴하고, 페데라시온과 솔다도 요새를 점령했다.[1] 한편, 테일러는 몬테레이 동쪽에 대한 기만 공격을 시작했고, 이는 곧 실제 공격으로 이어졌다.[1] 미군은 무두장을 점령하고,[1] 라 테네리아 요새를 함락시켰다.[1][2][3]
9월 23일, 워스는 텍사스 레인저와 보병대를 이끌고 리베르타드 요새를 점령하고, 곧이어 오비스파도를 장악하여 몬테레이 서쪽을 확보했다.[1][2] 멕시코군은 몬테레이 동쪽의 외곽 방어선을 버리고 플라자 마요르에 집결했고, 존 A. 퀴트먼 여단은 몬테레이 동쪽을 장악했다.[1]
3일 동안 미군은 도시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멕시코의 거센 저항으로 미군 장교들은 상당한 손실을 입었고, 미군의 총병 부대는 몬테레이 마을의 많은 요새의 벽을 비집고 들어갈 수 없었다.
3. 2. 미군의 공격
3일 동안 미군은 도시를 점령하는데 실패했다. 멕시코군의 거센 저항으로 미군 장교들은 상당한 손실을 입었고, 미군의 총병 부대는 몬테레이 마을의 많은 요새 벽을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1] 3일째, 텍사스 레인저스 부대와 윌리엄 J. 워스 장군 휘하의 보병 부대는 겨우 마을 서쪽의 4개의 언덕을 점거했다.[1] 여기에 큰 대포를 설치하여 언덕에서 벗어나 후퇴하는 군대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했다. 미군은 양동 작전으로 동서로 나뉘어 마을로 진격했다.[1]재커리 테일러 장군의 군대는 텍사스 사단(제임스 핀크니 헨더슨 소장 겸 텍사스 주지사 제임스 핀크니 헨더슨)이 선두에 선 채 9월 19일 오전 9시에 몬테레이 앞 평원에 도착했고, 성채 꼭대기에 위치한 산 파트리시오 포대에 있는 호세 로페스 우라가 대령의 제4보병대 포병의 사격을 받았다.[1] 테일러는 공병대(조셉 K. 맨스필드 소령)의 정찰을 위해 군대가 보스케 데 산 도밍고에 진을 치도록 명령했다.[1]
성채 외에도 도시 내 멕시코군의 주요 거점은 다음과 같았다.[1]
- "흑색 요새"(호세 로페스 우라가 대령, 제3·4선 및 9문의 대포 – "산 파트리시오" 포대 포함)
- "무두장"(라 테네리아)(호세 M. 카라스코 대령 지휘하의 제2경보병대와 케레타로 대대 일부, 2문의 대포 및 1문의 산악 포 – J. 에스페호 중위)
- 엘 포르틴 델 린콘 델 디아블로(칼리스토 브라보 중령과 3문의 대포 – 이그나시오 호아킨 델 아레날 대위)
- 라 푸리시마 다리와 테트드퐁(아과스칼리엔테스의 활동부대, 호세 페로 대령과 케레타로 지휘관 호세 마리아 에레라 지휘하, 3문의 대포 – P. 구티에레스 대위)
도시 서쪽 인데펜덴시아 꼭대기에는 리베르타드 요새(4문의 대포)와 오비스파도(주교 관저)가 있었고, 프란시스코 데 베라 중령이 이끄는 멕시코 활동 부대와 3문의 대포와 1문의 곡사포가 주둔했으며, 페데라시온 꼭대기에는 반월형 요새(2문의 대포)와 솔다도 요새가 있었다.[1] 라 플라자 예비대에는 후안 카스트로 중령 지휘하의 제3경보병대와 1문의 대포(아구스틴 에스피노사 중위)가 있었다.[1]
재커리 테일러 장군은 주력 부대를 동쪽에서 공격하는 동시에 윌리엄 J. 워스 사단을 이용하여 거대한 북서쪽 "갈고리" 기동으로 몬테레이 서쪽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1] 워스는 9월 20일 오후 2시에 존 커피 헤이스 대령의 텍사스 기병 소총병 연대가 선봉을 서서 출발했지만, 살티요 도로에서 3마일 떨어진 곳에서 야영했다.[1]
9월 21일 오전 6시, 워스는 전진을 계속하여 후안 나헤라 대령의 할리스코 기병대의 돌격을 격퇴하고, 나헤라 대령과 마누엘 로메로 장군 여단과 마리아노 모레트 중령의 과나후아토 연대 선봉대를 사살했다.[1] 오전 8시 15분, 워스는 살티요 도로를 몬테레이에서 차단하고, 찰스 F. 스미스 대위에게 보병 300명과 텍사스인, 딕슨 마일스 대위의 제7보병대 및 퍼시포어 스미스의 제2여단을 파견하여 페데라시온과 솔다도 요새를 점령하게 했는데, 그들은 이를 신속하게 점령했다.[1]
한편, 테일러는 존 갈랜드 대령의 제1·3보병대와 윌리엄 H. 왓슨 중령의 메릴랜드 및 컬럼비아 특별구 대대를 이용하여 몬테레이 동쪽에 대한 기만 공격을 시작했고, 이는 신속하게 공격으로 이어졌다.[1] 오전 8시, 일렉투스 배커스 대위의 제1보병대 중대가 무두장을 점령했고, 정오에는 윌리엄 B. 캠벨 대령의 제1테네시 및 미시시피 소총병대가 라 테네리아 요새를 점령했다.[1][2][3]
9월 22일에는 공격이나 돌격이 없었다.[1]
9월 23일 오전 3시, 워스는 텍사스 레인저와 제4·8보병대를 토마스 차일즈 중령 지휘하에 파견하여 인데펜덴시아의 리베르타드 요새를 점령하게 했고, 그들은 해 뜰 무렵에 이를 점령했다.[1] 제임스 던컨의 포병대의 도움으로 그들은 곧 오비스파도를 점령하고 몬테레이 서쪽을 장악했다.[1][2] 그때 쯤 멕시코군은 몬테레이 동쪽의 외곽 방어선을 버리고 플라자 마요르에 집결했고, 존 A. 퀴트먼 여단은 오전 11시까지 몬테레이 동쪽을 장악했다.[1]
9월 23일 오후 2시, 워스 장군은 서쪽에서 도시로 진격하여, 오후 늦게 플라자 데 라 카펠라에 설치된 박격포의 지원을 받아 집집마다 전투를 벌였고, 오후 11시까지 광장 서쪽 한 블록 내에 있었다.[1] 텍사스 자원병들은 미국 정규군에게 도시 전투의 새로운 기술을 가르쳤는데, 이 기술은 9월 21일에는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이 새로운 시가전 기술을 갖춘 미국군은 텍사스, 미시시피, 테네시 자원병과 함께 집집마다 이동하며 옥상과 멕시코 북부의 두꺼운 어도비 벽으로 된 집 안에 숨어 있는 멕시코군을 소탕했다.[4][5] 오후 2시, 테일러와 퀴트먼은 광장 동쪽 두 블록 이내에 있었는데, 테일러는 해가 지기 전에 철수를 명령했다.[1]
거리 곳곳에서 백병전이 이어졌다. 텍사스 레인저스는 집안에 경량 대포를 쏘아 가벼운 부상을 입혔지만, 멕시코 병사들을 창밖으로 날려 버렸다.[4][5] 멕시코 군은 마을 광장으로 집결했다. 마을 광장에서 덫에 걸려 적의 곡사포 유탄 포격을 받은 암푸디아 장군은 협상하기로 결정했다.[1] 적지에서 더 많은 병력과 싸웠야 했던 테일러는 항복의 대가로 2개월 휴전 협정을 협상했다. 멕시코군은 9월 26일부터 28일까지 개인 무기와 6문의 대포로 구성된 야전 포병 1개 포대를 가지고 도시에서 행군할 수 있었다.[1]
3. 3. 시가전
3일 동안 미군은 멕시코군의 거센 저항으로 도시 점령에 어려움을 겪었다. 미군 장교들은 큰 피해를 입었고, 보병 부대는 몬테레이 마을 요새의 벽을 뚫지 못했다.[1] 그러나 3일째, 텍사스 레인저스 부대와 윌리엄 J. 워스 장군 휘하의 보병 부대가 마을 서쪽의 4개 언덕을 점거하고, 큰 대포를 설치하여 멕시코군을 공격했다.[1] 미군은 양동 작전으로 동서로 나뉘어 마을로 진격했다.[1]거리 곳곳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텍사스 레인저스는 집 안에 경량 대포를 쏘아 멕시코 병사들을 공격했다.[1] 멕시코 군은 마을 광장으로 집결했고, 그곳에서 곡사포 유탄 포격을 받은 암푸디아 장군은 협상을 결정했다.[1] 9월 23일, 텍사스 자원병들은 미국 정규군에게 새로운 시가전 기술을 가르쳤다.[4][5] 이들은 집집마다 이동하며 멕시코군을 소탕했고, 결국 암푸디아 장군은 9월 24일에 협상에 나섰다.[1]
결국, 테일러는 도시 항복의 대가로 2개월 휴전 협정을 맺었다.[1]
3. 4. 멕시코군의 항복
3일 동안 미군은 도시를 점령하는데 실패했다. 멕시코군의 거센 저항으로 미군 장교들은 상당한 손실을 입었고, 미군의 총병 부대는 몬테레이 마을의 많은 요새의 벽을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4][5] 3일째에, 텍사스 레인저스 부대와 윌리엄 J. 워스 장군 휘하의 보병 부대는 겨우 마을 서쪽의 4개의 언덕을 점거했다. 여기에 큰 대포를 설치하여 언덕에서 벗어나 후퇴하는 군대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했다. 미군은 양동 작전으로 동서로 나뉘어 마을로 진격했다.[1]도시 거리 곳곳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텍사스 레인저스는 집안에 경량 대포를 쏘아 멕시코 병사들을 창밖으로 날려 버렸다.[1] 멕시코 군은 마을 광장으로 집결했다. 마을 광장에서 덫에 걸려 적의 곡사포 유탄 포격을 받은 암푸디아 장군은 협상하기로 결정했다.[1] 적지에서 더 많은 병력과 싸웠야 했던 테일러는 항복의 대가로 2개월 휴전 협정을 협상했다.[1] 멕시코군은 9월 26일부터 28일까지 개인 무기와 6문의 대포로 구성된 야전 포병 1개 포대를 가지고 도시에서 행군할 수 있었다.[1]
4. 전투 후
9월 30일 암푸디아는 휴전선 너머로 이동했고, 11월 초에 산루이스포토시로 갔다.[13][1]
테일러와 암푸디아가 합의한 휴전은 전쟁의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테일러는 연방 정부의 비난을 받았고, 제임스 K. 폴크 대통령은 미군은 휴전 협상권은 전혀 없고 단지 ‘적을 죽이기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 또한 암푸디아의 군에게 전투의 명예와 무기를 모두 가지고 철수를 허용한 그의 휴전의 조건은 미국 측 참관자가 보기엔 어리석은 소견으로 보였다.
한편, 암푸디아가 멕시코의 패전을 시작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많은 멕시코 군인들이 전쟁에 환멸을 느꼈다. 몬테레이와 같이 요새가 견고하고 보급이 잘 된 곳에서 1만 명의 멕시코 병사들은 3일 동안 미국군에 저항했지만, 미국의 시가전 전술, 중화기, 그리고 멕시코군 장교들의 분열로 인해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6]
침략군은 도시를 점령하고 1848년 6월 18일까지 남아 있었다. 점령이 이루어지자마자 미국 육군은 민간인을 여러 명 처형했고 여러 여성들이 강간당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학살 중 하나는 1847년 1월 4일 휴스턴 텔레그래프 앤드 레지스터(Houston Telegraph and Register)가 보도한 것으로, 텍사스 자원병들이 몬테레이에서 동료 몇 명의 죽음에 대해 멕시코인들을 비난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인들은 만나는 모든 민간인들을 사살하기 시작했다. 신문은 군 관계자들을 인용하여 단일 사건에서 50명 이상의 민간인이 몬테레이에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유사한 폭력 행위는 마린(파괴되고 불타버림), 아포다카와 리오그란데와 몬테레이 사이의 다른 마을들과 같은 주변 점령지에서 발생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공격은 텍사스 레인저스가 자행했다.[7][8] 몇몇 미국 자원병들은 이러한 공격을 비난하고 텍사스 전쟁 당시 멕시코의 캠페인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들에게 증오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 텍사스 레인저스를 비난했다. 미국 점령 전후로 많은 수의 민간인들이 도시를 떠났다. 점령에 대한 대응으로 안토니오 카날레스 로실로와 호세 우레아가 이끄는 것과 같은 여러 지역 게릴라 그룹이 등장했는데, 후자는 10년 전 텍사스 독립 전쟁에서의 지도력 참여 때문에 텍사스인들에게 널리 비난받았다.[9] 테일러는 자신의 부하들이 저지른 잔혹 행위를 인정했지만, 그들을 처벌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10]
4. 1. 미국의 몬테레이 점령
9월 30일, 암푸디아는 휴전선 너머로 이동했고, 11월 초에 산루이스포토시로 갔다.[13][1]
테일러와 암푸디아가 합의한 휴전은 전쟁의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테일러는 연방 정부의 비난을 받았고, 제임스 K. 폴크 대통령은 미군은 휴전 협상권은 전혀 없고 단지 ‘적을 죽이기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 또한 암푸디아의 군에게 전투의 명예와 무기를 모두 가지고 철수를 허용한 그의 휴전의 조건은 미국 측 참관자가 보기엔 어리석은 소견으로 보였다. 그의 편을 들어, 어떤 이들은 암푸디아가 멕시코 패전을 시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많은 멕시코 군인들이 전쟁에 환멸을 느꼈다. 몬테레이 같은 단단한 요새에다, 잘 보급된 장소에 1만명의 멕시코 병력은 3일 동안 미군에 저항했지만, 미국의 시가전 전술, 중화기, 게다가 멕시코 군 장교들의 내부 분열에 의해 그냥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6]
침략군은 도시를 점령하고 1848년 6월 18일까지 남아 있었다. 점령이 이루어지자마자 미국 육군은 민간인을 여러 명 처형했고 여러 여성들이 강간당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학살 중 하나는 1847년 1월 4일 휴스턴 텔레그래프 앤드 레지스터(Houston Telegraph and Register)가 보도한 것으로, 텍사스 자원병들이 몬테레이에서 동료 몇 명의 죽음에 대해 멕시코인들을 비난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인들은 만나는 모든 민간인들을 사살하기 시작했다. 신문은 군 관계자들을 인용하여 단일 사건에서 50명 이상의 민간인이 몬테레이에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유사한 폭력 행위는 마린(파괴되고 불타버림), 아포다카와 리오그란데와 몬테레이 사이의 다른 마을들과 같은 주변 점령지에서 발생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공격은 텍사스 레인저스가 자행했다.[7][8] 몇몇 미국 자원병들은 이러한 공격을 비난하고 텍사스 전쟁 당시 멕시코의 캠페인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들에게 증오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 텍사스 레인저스를 비난했다. 미국 점령 전후로 많은 수의 민간인들이 도시를 떠났다. 점령에 대한 대응으로 안토니오 카날레스 로실로와 호세 우레아가 이끄는 것과 같은 여러 지역 게릴라 그룹이 등장했는데, 후자는 10년 전 텍사스 독립 전쟁에서의 지도력 참여 때문에 텍사스인들에게 널리 비난받았다.[9] 테일러는 자신의 부하들이 저지른 잔혹 행위를 인정했지만, 그들을 처벌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10]
4. 2. 멕시코의 대응
9월 30일 암푸디아는 휴전선 너머로 이동했고, 11월 초에 산루이스포토시로 갔다.[13][1]
테일러와 암푸디아가 합의한 휴전은 전쟁의 결과에 큰 효과를 가져왔다. 테일러는 연방 정부의 비난을 받았고, 제임스 K. 포크 대통령은 미군은 휴전 협상권은 전혀 없고 단지 ‘적을 죽이기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 또한 암푸디아의 군에게 전투의 명예와 무기를 모두 가지고 철수를 허용한 그의 휴전의 조건은 미국 측 참관자가 보기엔 어리석은 소견으로 보였다.
한편, 암푸디아가 멕시코의 패전을 시작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많은 멕시코 군인들이 전쟁에 환멸을 느꼈다. 몬테레이와 같이 요새가 견고하고 보급이 잘 된 곳에서 1만 명의 멕시코 병사들은 3일 동안 미국군에 저항했지만, 미국의 시가전 전술, 중화기, 그리고 멕시코군 장교들의 분열로 인해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6]
4. 3. 정치적 영향
테일러와 암푸디아가 맺은 휴전은 전쟁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임스 K. 폴크 대통령은 미군은 휴전 협상 권한이 없고 "적을 죽이는 것"만이 임무라고 주장하며 테일러를 비난했다.[14][6][1] 또한 암푸디아 군에게 전투 명예와 무기를 가지고 철수하도록 허용한 휴전 조건은 미국 측에서 어리석은 판단으로 보였다.[14][6] 반면, 멕시코 군인들은 몬테레이와 같이 견고한 요새에서 3일 만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환멸을 느꼈고, 암푸디아가 멕시코 패전을 시작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14][6] 이러한 멕시코군의 항복은 미국의 시가전 전술, 중화기, 그리고 멕시코군 장교들의 내부 분열이 원인이었다.[14][6][1]한편, 미군 점령 기간 동안 텍사스 레인저스를 중심으로 민간인 학살과 강간 등 잔혹 행위가 벌어졌다.[7][8] 1847년 1월 4일, 휴스턴 텔레그래프 앤드 레지스터는 텍사스 자원병들이 몬테레이에서 동료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50명 이상의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보도했다.[7] 마린, 아포다카 등 주변 지역에서도 유사한 폭력 행위가 발생했다.[7][8] 몇몇 미국 자원병들은 이러한 공격을 비난하며 텍사스 레인저스가 텍사스 전쟁 당시 멕시코의 군사 작전에 대한 보복으로 증오 범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했다.[7][8] 안토니오 카날레스 로실로와 호세 우레아와 같은 지역 게릴라 그룹이 점령에 저항했지만, 테일러는 부하들의 잔혹 행위를 인정하면서도 처벌하지 않았다.[9][10]
5. 몬테레이 전투와 한국
6. 평가와 의의
6. 1. 군사적 측면
6. 2. 정치적 측면
6. 3.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중도진보적 관점)
참조
[1]
서적
The Mexican War, 1846–1848
Macmillan
[2]
웹사이트
Street Fight in Monterrey
https://militaryheri[...]
2009-08-01
[3]
간행물
Fatídica Orden: Asalto Yanqui Sobre Monterrey
2006-09-01
[4]
웹사이트
Street Fight in Monterrey
https://militaryheri[...]
2009-08-01
[5]
웹사이트
Urban Warfare at Monterrey
http://www.battleofm[...]
[6]
서적
The War with Mexico
Macmillan
[7]
서적
Nuevo León ocupado: aspectos de la guerra México–Estados Unidos
https://books.google[...]
Fondo Editorial de NL
2017-01-17
[8]
서적
[9]
서적
[10]
서적
Mexico Under Fire: Being the Diary of Samuel Ryan Curtis, 3rd Ohio Volunteer Regiment, During the American Military Occupation of Northern Mexico, 1846–1847
https://books.google[...]
TCU Press
2017-01-17
[11]
서적
The War in Mexico
[12]
서적
Memorias
[13]
서적
The Mexican War, 1846-1848
Macmillan
[14]
서적
The War with Mexico
Macmil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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